역사 결정론

역사 결정론에 대한 E. H. 카의 견해:

나는 결정론이란 모든 사건에는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들이 있고 그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들 중에서 무엇인가 달라진 것이 없었다면 그 사건은 다른 식으로는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신념 - 이에 관해서는 논쟁이 없기를 바라면서 - 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결정론은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행위의 문제이다. 원인도 없이 행동하며 따라서 그 행동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인간이란, 우리가 지난번 강연에서 논의한 바 있듯이, 사회의 밖에 존재하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추상이다. ‘인간사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칼 포퍼 교수의 주장은 의미가 없거나 거짓말이다. 일상생활에서는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으며 믿을 수도 없다. …

옛날에는 자연 현상이 분명히 신의 의지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현상의 원인들 탐구하는 것을 불경스럽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제이아 벌린 경이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의지의 지배를 받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인간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를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도 이와 동일한 사고방식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쩌면 오늘날 사회 과학의 발전수준이 이러한 논의가 자연과학을 퇴행시켰을 때의 그 자연과학의 발전수준과 똑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여러분은 날마다 일을 시작할 때 늘상 스미스를 만나곤 한다. … 어느날 아침, 스미스가 흔히 하던 대로 여러분의 인사말에 대답하는 대신 여러분의 개인적 용모나 성격에 대해서 갑자기 거칠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가정해보자. 여러분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것이야말로 스미스의 의지의 자유로움을 확인케 해주는, 인간사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케 해주는 증거라고 간주하겠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와는 반대로, 여러분은 아마 이런 식으로 말할 지 모른다. ‘불쌍한 스미스! 물론 자네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지’ 라든가, ‘불쌍한 스미스! 틀림없이 부인과 대판 싸웠군’이라고 말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여러분은 거기에 틀림없이 무엇인가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겉으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어 보이는 스미스의 행동의 원인을 진단해보려고 할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여러분이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제이아 벌린 경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하는 것인데, 그는 여러분이 스미스의 행위를 인과론적으로 설명함으로써 헤겔과 마르크스의 결정론적인 가설(유물론적 역사관)을 덥석 받아들였고, 따라서 스미스를 고약한 놈이라고 비난해야 할 여러분의 임무를 회피했다고 몹시 불평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그 누구도 그런 견해를 취하지 않으며, 결정론인가 아니면 도덕적 책임인가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 의지와 결정론에 관한 논리적인 딜레마는 실제생활에서는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이런 행동은 자유롭고 저런 행동은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것을 고찰하는 관점에 따라 자유롭기도 하고 동시에 결정되어 있기도 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실제적인 문제에서는 달라진다. 스미스의 행동에는 하나 혹은 여러 가지의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 행동이 어떤 외부적인 강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인격의 강제에 의해서 비롯된 것인 한, 그는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 했는데, 왜냐하면 정상적인 성인이 자신의 인격에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은 사회생활의 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수한 경우에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묻지 말아야 하는지는 여러분이 실제적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설령 여러분이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행동에 아무런 원인도 없다고 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원인과 도덕적 책임은 서로 다른 범주이다. 최근 이 대학교에 범죄학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나는 범죄의 원인을 연구하게 된 사람들은 누구나 그 연구가 자신들로 하여금 범죄자의 도덕적 책임을 부정하도록 만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see also Fact-value distinction —AK).

—p142-145, 역사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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